헨리 푸젤리, 악몽(일부 확대), 1781, 캔버스에 유채, 101.6x126.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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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유린하는 존재
악몽 인큐버스의 등장
골드몽사이트
헨리 푸젤리, 악몽, 1781, 캔버스에 유채, 101.6x126.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녀는 지금 깨어날 수 없다. 배 위에 올라 엉덩이를 깔고 앉은, 그놈 때문에.
10원야마토게임 인큐버스(Incubus)는 여인의 꿈에 나와 그 몸을 농락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보통 억지로 관계를 맺거나, 하룻밤 내내 몸을 짓눌러 고통을 가하는 남성형 괴물로 묘사된다. 어원은 라틴어로 ‘위에 눕다’라는 뜻의 인쿠바레(incubare). 중세 유럽인은 녀석을 하급 악마의 한 종류로 분류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인큐버스가 언제
야마토게임연타 등장하고,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고 봤는가.
이들은 인큐버스가 혼자 자는 여성부터 노린다고 믿었다. 순서를 따진다면 신앙심이 깊은 이부터 덮친다고 여겼다. 그런가 하면 몸을 뒤척이다 상체를 다리보다 아래로 둔, 그런 자세의 여인이 있다면 결코 지나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놈들이 잠든 여인을 신체적으로 유린하는 데도 명확한 이유가 있는
골드몽릴게임릴게임 것으로 봤다. 번식이었다. 당시 교리로 보면 악마끼리는 생식(生殖)할 수 없었기에, 그 ‘씨앗’을 인간 몸에 대신 넣으려 한다고 확신했다. 또, 이 과정 중 쾌락을 줘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목적도 있다고 판단했다.
헨리 푸젤리, 악몽(일부 확대), 1781, 캔버스에 유채,
골드몽 101.6x126.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이러한 인큐버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공포였으리라.
요즘에야 인큐버스가 미남자의 외형으로 굳어진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렇기에 일부 지역에선 인큐버스를 악몽과 아예 동일시하기도 했다. 악몽을 뜻하는 말, 나이트메어(nightmare). 그런데 여기서 마라(mara)는 ‘메어(mare·암말)’와도 철자가 비슷한 만큼 오독, 또는 언어유희 목적으로 혼용돼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인큐버스는 악몽, 악몽은 암말. 이런 식으로 인큐버스가 졸개 격으로 암말을 데리고 있는 표현 또한 적지 않은 건.
헨리 푸젤리, 악몽(일부 확대), 1781, 캔버스에 유채, 101.6x126.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헨리 푸젤리(Henry Fuseli·1741~1825)의 <악몽>은 이런 신화와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그림이다.
인큐버스가 깔아뭉갠 여인. 홀로 잠든, 떨어질 듯 상체를 밑으로 내린 그녀는 깊은 꿈에 빠져있다. 뒤편에선 인큐버스와 함께 온 암말이 얼굴을 드러낸다. 녀석은 마법을 부려 그녀를 더 기괴한 악몽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이곳은 핏빛 천으로 둘러싸인 침실. 이불조차 덮지 못한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보인다. 한편에 놓인 약도 이들을 막을 수 없고, 거울 또한 이들을 잡아내지 못한다. 두 악마는 자기들만의 밤을 느긋하게 즐기게 되리라.
분명히 도발적이지만,
그렇기에 또 매력적인
제임스 노스코트, 헨리 푸젤리 초상화, 77.8x64.5cm
1782년 여름, 푸젤리가 영국 런던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악몽>을 선보인 그날.
사람들은 드디어 푸젤리의 이름을 바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비평가들은 <악몽> 속 노골적인 표현에 충격을 받았다. 소름을 일깨우는 사실적 묘사는 물론, 빛과 어둠을 극명히 대비시킨 기법 또한 시선을 끌었다. 인큐버스의 거무튀튀한 살갗이 뽀얀 자태의 여인 몸 위에 있는 것. 이는 긴장감을, 아울러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배경은 또 어떤가.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검은색은 주름진 천과 딱딱한 가구 사이에서 물결치듯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림은 분명 도발적이었지만, 이런 점에서 더더욱 매력적인 면도 있었다.
인간이란 종종 위험한 이에게 더 끌리고, 때로는 안정보다 위태로움에 중독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번 작품도 그 본성을 일깨운 것이었다.
색욕과 모독, 유혈 안고
돌고 돌아, 예술가 길로
헨리 푸젤리, 티타니아와 보텀, 1790년경, 캔버스에 유채, 217.2x275.6cm, 테이트
푸젤리의 마음속 엔진은
색욕과 신성 모독,
그리고 유혈일 것이다.
화가 벤저민 헤이든(Benjamin Haydon·1786~1846)
푸젤리는 특유의 농밀한 긴장감이 담긴 회화로 명성을 다졌다.
낭만적 사고, 틀을 깨는 감성이 그 예술혼을 뒷받침했다. 이는 미술, 신학에서 인문학으로 이어지는 지식,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존 밀턴 등을 직접 번역까지 할 만큼의 방대한 독서량에서 피어난 역량이었다.
헨리 푸젤리, 죽은 지크프리드에게 몸을 던지는 크림힐트, 1817, 캔버스에 유채, 102x127cm, 취리히 미술관
1741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푸젤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푸젤리의 아버지는 그가 종교인이 되길 바랐다. 푸젤리는 이에 어릴 적부터 신학부터 배웠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실했다. 금방 교리를 흡수했다. 나이가 찬 후에는 사제로 서품(敍品)을 받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직을 내려놓는다. 본인의 급진적 성향이 비교적 보수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어울릴 수 없다고 본 듯하다. 더 구체적인 설도 나오기는 한다. 푸젤리와 그의 친구가 취리히시 내 부패 의혹에 휘말린 관리를 글로 질타했는데, 그 일이 잘못 꼬여 교직(敎職) 길이 막혀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무엇이 결정적 계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푸젤리는 이후 몇 해간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 등에서 살았다. 그렇게 고향을 벗어난 그는 작가와 번역가로 생을 이어갔다. 다행히 수년간 신학을 공부한 게 완전히 헛수고가 되지는 않았다. 이 덕에 글과 책에 익숙해졌으며, 경계 없는 상상력까지 품게 됐으니. 푸젤리는 이런 삶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는 이였다. 그러니까, 그림 그리기는 적당한 취미 정도로만 둘 수도 있는 생이었다.
조슈아 레이놀즈, 자화상, 1750년경, 캔버스에 유채, 63.5x47.6cm, 예일 영국 미술 센터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장,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1723~1792).
그가 잔잔해지고 있는 푸젤리의 삶에 재차 파동을 일으켰다. 레이놀즈는 푸젤리가 그린 습작에서 가능성을 엿봤다. 시키는 대로 잘 그리는 재능도 흔치 않지만, 마음껏 풀어놨을 때도 잘 그리는 능력은 이보다 더 희귀한 것이었다. 레이놀즈가 푸젤리를 ‘건져올린’ 해가 1764년이었다. 푸젤리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헨리 푸젤리, 탈의, 1806~1807, 캔버스에 유채, 91x71cm, 개인소장
레이놀즈의 격려에 힘입은 푸젤리는 본인 삶을 재설계했다.
그는 어릴 적에 접은 꿈, 화가의 길에 다시 올라섰다. 푸젤리는 성실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는 1770년부터 이탈리아에서 고전 예술을 공부했다. 체류 기간은 8년가량이었다. 푸젤리가 그곳에서 인상 깊게 본 건 옛 시절 조각품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후기작, 그리고 르네상스 화풍 이후 잠깐 등장했던 매너리즘 회화였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필요하면 과장과 변형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의 용기에 감화하는 나날이었다.
뻔한 고전풍과 아예 다른
뜻밖 현대적 악마의 탄생
헨리 푸젤리, 고대 유적의 웅장함 앞에 선 예술가의 절망(감동), 1741~1825, 갈색 종이에 붉은 분필 등, 41.5x35.5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고대 유적의 웅장함 앞에 선 예술가의 절망(감동)>.
푸젤리가 붉은 분필과 갈색 물감만으로 긋고 칠한 비교적 초기작이다. 이는 까마득한 과거(313~324년 추정)에 만든 1.66m 크기의 <콘스탄티누스의 오른손(일부)> 등을 본 예술가가 압도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많은 이가 동시대의 깔끔한 예술을 보고 자화자찬하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 ‘거인’의 손끝에 이르지 못한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
금 간 벽, 큼직한 묘사, 유적에 손을 댄 채 흐느끼는 인간….
푸젤리는 이때부터도 과장과 왜곡, 변형의 미학에 눈을 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젤리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거듭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수백년간 이어진, 그럼에도 점차 퇴화하고 있는 듯 보이는 고전풍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여야겠다고.
줄리아 로마노, 헤카베(헤쿠바)의 꿈, 16세기경, 프레스코, 만토바 공작 궁
잠자는 아리아드네, 바티칸 박물관 [BWknight94, CC BY-SA 3.0, 위키미디어]
그런 푸젤리가 런던에 돌아오고 얼마 안 돼 선보인 게 <악몽>이었다.
이런 그림은, 분명 지금까지는 보기 힘든 예술이었다. 화가의 자아가 전통을 압도하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책과 견학으로 다진 상상력을 스스럼없이 내보인 결과물이었다.
푸젤리가 참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 있긴 하다.
늘어진 여성은 줄리아 로마노의 <헤카베의 꿈> 또는 바티칸 박물관 내 <잠자는 아리아드네> 조각상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이 또한 곧이곧대로 따라하지 않으려고 한 게 분명하다. 괴상한 악마를 대놓고 내보여 불안감을 높이는 한편, 착 달라붙은 원피스로 되레 요염함도 끌어올린…. 그러니까, <악몽>은 한 인간의 개성과 취향이 넘실대는 ‘현대적인’ 작품이기도 하니까. 고전의 굴레를 끊은, 재차 또 말하자면, 정말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예술품이었다.
‘악몽’ 뒷면의 미스터리,
쓰린 개인사를 담았는가
헨리 푸젤리, 안나 란트홀트(악몽 뒷면에 있는 그림), 1779년경
그런데, 푸젤리의 <악몽> 뒷면에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걸 아는가.
거기에는 젊은 여인의 미완성 초상화가 있다. 그녀는 풍성한 머리칼과 크고 또렷한 눈을 가졌다. 상체가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었다. 한쪽 손은 어깨 위로 들어올렸으며, 무언가를 쥔 나머지 손은 골반 아래로 길게 내렸다. 뒤에는 또 붉은색 천이 걸려 있다. 그녀는 당당해보인다. 다만, 어둠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배경은 긴장되는 감정도 함께 일깨운다.
푸젤리가 이 여인을 왜 굳이 <악몽>과 한 몸이 되게 했는지를 놓곤 의견이 엇갈린다.
여인은 푸젤리가 사랑했던 이, 안나 란트홀트로 알려졌다. 푸젤리는 <악몽>을 작업하기에 앞서 잠시 취리히로 간 적이 있었다. 푸젤리는 거기서 우연히 란트홀트를 마주하고, 밑도 끝도 없이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란트홀트는 푸젤리의 친구이자 생리학자였던 요한 카스파 라바터의 조카였다. “어젯밤 나는 란트홀트와 함께 침대에 있었어. (…) 그녀는 내 것이고, 나는 그녀의 것이야. 나는 반드시 그녀를 차지할 거야.” 언젠가 푸젤리는 라바터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푸젤리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란트홀트의 아버지가 극구 반대한 탓이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일. 푸젤리가 생각한 최악의 결말 또한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미술사학자 H. W. 얀슨은 <악몽> 속 인큐버스가 푸젤리 본인, 여성이 란트홀트일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제는 실현할 수 없는 소유와 정복의 꿈을 그림으로 해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헨리 푸젤리, 악몽, 1790~1791, 캔버스에 유채, 75x64cm, 괴테 하우스
<악몽>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푸젤리는 <악몽>의 기록적 흥행에 힘입어 이를 참고한 새로운 그림도 여럿 그렸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건 1790~1791년경에 작업한 작품일 것이다. 미소짓는 인큐버스, 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내보이는 암말이 잠든 여성을 괴롭히는 작품이다.
니콜라이 아빌가르드, 악몽, 1800, 캔버스에 유채, 35.3x41.7cm, 소뢰 미술관
디트리우 브렁크, 악몽, 1846, 캔버스에 유채, 49x62cm, 니바가르드 박물관
<악몽>은 이 밖에도 동시대와 후세대 많은 이에게 영감을 안기기도 했다.
가령 덴마크 화가 니콜라이 아빌가르드는 이를 참고해 보다 노골적인 누드화를 그렸다. 화가 디트라우 브렁크는 인큐버스에 토끼 귀를 붙였다. 천과 가구, 소품도 다채롭게 묘사해 같은 구도를 보다 캐주얼하게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악몽>의 판화를 자기 아파트에 직접 걸어뒀었다고 한다.
후진 양성 상상력을 강조
제역할 뒤 명예로운 퇴장
헨리 푸젤리, 요르문간드 뱀을 때리는 토르, 1790, 캔버스에 유채, 133x94.6cm, 영국 왕립 예술 아카데미
탄탄한 근육질의 남성이 사슬을 물고 올라오는 뱀을 둔기로 후려치려고 한다.
이 사내는 북유럽 신화 속 천둥과 번개의 신, 토르. 그가 무찌르고자 하는 건 숙적, 요르문간드 뱀이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토르는 거인 히미르와 함께 낚시를 한다. 대어를 잡고 싶던 토르가 미끼로 쓴 건 무려 황소의 머리(!). 굉장히 단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게 통한다. 지구를 통째로 한 바퀴 두를 만큼 몸통이 긴 요르문간드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바다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이 뱀은 낚싯바늘에 걸린 육중한 미끼를 한입에 삼켰다. 그러다 토르의 팔힘에 걸려 낚아 올려지고 만 것이었다. 토르는 물 밖으로 모습을 보인 요르문간드와 한판 대결을 벌이려고 한다. 그렇게 등허리에서 망치 묠니르를 꺼내려는 순간, 이들의 대결에 겁먹은 거인 히미르가 사슬을 끊어버린다. 화폭 속 움츠러든 회색 수염의 노인이 그다. 이 덕에 요르문간드는 무사히 심해로 돌아갈 수 있었다. 토르는 아쉬워하며 방방 뛰지만,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한편 화폭 왼쪽 위에선, 이 모든 장면을 토르의 아버지 오딘이 바라보고 있기도 한다. 푸젤리의 작품, <요르문간드(미드가르드)를 때리는 토르>다. 이상적 몸매의 토르와 히미르는 신고전주의 양식, 요동치는 요르문간드의 몸통은 매너리즘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짙은 안개와 성난 파도 등 기묘한 연출도 역시나 힘 있고, 현대적이다.
푸젤리는 <악몽> 하나로 이른바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가 된 화가로 볼 수 없다.
그는 이렇듯 자신만의 낭만적 감성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예술가였다. 푸젤리는 <요르문간드를 때리는 토르>로 왕립 미술 아카데미 정회원에 오를 수 있었다.
헨리 푸젤리, 두 여인을 두고 떠나는 인큐버스, 1793, 캔버스에 유채, 86.4x110.5cm, 개인소장
푸젤리는 이후 1799년부터 교편을 쥔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교사로 나선 것이다. 이때가 쉰여덟 살 나이였다.
푸젤리는 그의 그림만큼 가르침 또한 급진적인 축에 속했다. 그가 강조한 건 상상력이었다. 거장의 명작을 모사하는 일과 함께, 틀 밖에서 힘껏 상상하고 순발력 있는 결단도 내려보라는 게 핵심이었다.
헨리 푸젤리, 몽유병에 걸린 맥베스 부인, 1781~1784, 캔버스에 유채, 221x160cm, 루브르 박물관
그사이 셰익스피어를 위한 갤러리와 밀턴을 주인공으로 둔 갤러리를 연 적도 있었다.
이후 아카데미 회장, 또 회장과 교사를 겸임하기도 한 그는 후진 양성에 더더욱 힘을 쏟았다. 그는 스승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화가로는 개성있는 역사화로 이름을 알린 윌리엄 에티, 빅토리아 여왕까지 아낀 화가 에드윈 랜시어 등이 있다. 예술사에 진한 선을 그은 푸젤리가 아카데미 회장으로 지낸 기간은 21년에 이른다. 별다른 건강 위기 없이 노년을 맞은 그는 1825년에 사망했다. 시신은 세인트폴 대성당에 놓일 수 있었다. 꿈과 환상, 폭력과 성욕까지 가감 없이 내보일 수 있던 화가. 그는 점차 진지함과 엄숙주의로 쏠려가는 회화 세계에 보란 듯 균열을 낸 인간이었다. 떨어진 파편을 눈덩이 굴리듯 굴려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의 걸음은 멈췄지만, 그의 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후배와 제자들의 차례였다. 여러모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한, 명예로운 퇴장이었다.
참고 자료
Henry Fuseli, The Life and Writings of Henry Fuseli, Hutson Street Press
Macmillan, Duncan., Scotland and the Origins of Modern Art, Lund Humphries
Myrone, Martin.,Henry Fuseli, Tate Gallery Publishing 기자 admin@reelnar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