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133][브랜드로남은사람들_70]워너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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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 인수에 나선 넷플릭스
2025년 12월 초, 미국 미디어 산업의 질서를 다시 쓰는 사건이 터졌다. 전세계 1위 OTT업체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디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스커버리(WBD)의 핵심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827억 달러, 한국 돈으로 116조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발표였다. 이는 미디어 분야 기준으로 2017년 디즈니가 21세기 폭스를 713억 달러에 인수한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넷플릭스와 워너브라더스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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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해당 소식은 미디어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케이블·영화 스튜디오 간의 합병이 아니라,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미디어 문법을 만든 ‘뉴미디어 제국’ 넷플릭스가 100년 역사의 헐리우드 레거시 스튜디오를 통째로 품에 넣는, 시대적 전환을 상징하는
손오공게임 사건이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헐리우드를 이끌어온 위대한 미디어 제국에서 넷플릭스에 인수될 운명에 처한 워너브라더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워너브라더스는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4형제의 작은 도전에서 비롯됐다.
가난했던 4형제, 극장에
황금성오락실 서 시작된 생존의 모험
해리, 알버트, 샘, 그리고 잭. 19세기 후반, 워너가의 4형제는 폴란드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과 질병이 일상처럼 따라붙던 시절, 이들 형제 12명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7명에 불과할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1881년 태어난 해리 워너를 필두로 이들 형제는 더 나은 삶을 찾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아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오하이오 영스타에 자리 잡았지만 이곳에서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는 사치였고, 일자리는 구하기 어려웠다.
셋째 샘 워너는 작은 공연과 전시를 할 ‘올드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라는 공연장을 인수했지만 첫 사업은 당연하게도 실패였다. 그러던 중 동네에 ‘움직이는 사진’을 보여주는 영사기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샘은 영화 영사기사로 일하며 영화산업의 성장을 엿봤고 과감하게 1000달러를 투입해 영사기를 구입했다.
워너브라더스. 왼쪽부터 해리, 잭, 샘, 알버트 워너
“영사기 하나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다.”
그는 인생을 건 모험을 시작했다.
1903년, 형제들은 펜실베이니아 뉴캐슬의 허름한 빈 상가를 하나 구해 작은 극장을 열었다. 이 곳은 4형제의 누나 로즈가 살던 동네였다. 장의사에게 의자를 빌려오고, 막내 잭은 필름을 갈아 끼우는 동안 무대 앞에 나가 직접 노래를 불렀다. 관객의 웃음을 얻으려 별별 연기를 다했다. 그렇게 ‘워너의 극장(Warner’s Theatre)’은 조금씩 지역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906년 그들은 뉴캐슬에 있는 극장 하나를 더 인수했고 사업은 점차 성장했다. 극장 경영으로 돈을 번 이들은 1910년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워너브라더스 극장
하지만 형제들은 곧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너무나도 유명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었다.
발명왕의 횡포, 에디슨의 벽
영화 산업이 막 움트기 시작하던 시절, 미국 영화계의 절대 권력자는 발명왕 에디슨이었다. 그는 촬영기술과 영사기 특허를 독점했고, ‘에디슨 트러스트’를 통해 미국 내 대부분의 영화관과 배급사를 자신에게 종속시켜 놓았다. 특허료를 내지 않으면 곧바로 소송이 걸렸고, 장비를 압수당하는 경우도 흔했다.
워너 형제의 작은 극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허료 부담과 끊임없는 단속, 그리고 소송 위협이 형제들의 숨통을 죄었다. 극장은 어느 정도 관객을 모았지만, 수익은 줄어들었고 미래는 흐릿했다. 그러나 실패를 겪어도 물러서지 않는 성격은 네 형제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에디슨의 독점 체제에 분노하던 다른 독립 영화업자들과 힘을 합쳤고, 결국 법적·산업적 저항 끝에 에디슨의 특허 지배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살린 것이 아니라 미국 영화 산업의 지형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다.
초기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에디슨
워너 형제는 확신했다.
“우리는 더 이상 상영만 해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헐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세운 4형제
1918년, 할리우드가 막 태동하던 시기. 형제들은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스튜디오를 세워 제작사로 도약했다. ‘워너브라더스 버뱅크스튜디오’의 설립이었다. 이후 할리우드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개화했다. 영화산업을 축으로한 대중문화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일에서 ‘나의 4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그들은 6개 가량의 영화를 제작했다. 1923년, 회사의 이름을 ‘워너브라더스 픽처스’로 바꾸며 본격적인 할리우드 경쟁에 뛰어들었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투어
흥미로운 점은 워너브라더스의 첫 스타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바로 군견 린 틴 틴(Rin Tin Tin). 린 틴 틴은 무성영화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당시 주요 배우보다 높은 주급을 받았고, 워너의 최초 흥행을 책임졌다. 하지만 흥행의 불꽃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회사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경쟁사에 뒤처질 위험도 컸다. 이때 사업수완이 좋았던 셋째 샘 워너가 전면에 나섰다.
샘이 만든 혁신, 그리고 ‘재즈 싱어’의 탄생
샘 워너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혁신이 필요하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 한다.”
당시 영화는 모두 ‘무성’이었다. 장면 사이 타이틀 카드가 끼어 있고, 음악은 극장 구석 오케스트라가 즉석에서 연주해 넣었다. 샘은 배우의 목소리가 영화 속에 녹아있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미쳤다는 반응이 많았다. 유성영화는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관객이 원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샘은 물러서지 않았다. 회사 자원을 총동원해 ‘말하는 영화’ 기술 개발에 매달렸고, 마침내 1927년 역사적인 작품이 탄생했다.
재즈 싱어 포스터
바로 세계 최초로 배우 대사가 녹음된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완성된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성영화 표 값의 두 배를 받았지만 오히려 관객은 몰려들었고, 워너브라더스는 단숨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박수의 순간에 비극이 겹쳤다.
샘 워너가 ‘재즈 싱어’ 시사회를 하루 앞두고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평생 쫓아온 혁신은 성공했지만, 그 과정의 결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경영에 나선 막내, 영화계에 혁신을 도입하다
샘 워너가 세상을 떠난 뒤 워너브라더스의 키를 잡은 사람은 막내 잭 워너였다. 형제들 중 가장 캐릭터가 뚜렷했고,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인물이기도 했다. 잭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제작 전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뮤지컬 영화와 갱스터 무비 등에 집중 투자하며 성공을 거듭했다. 1928년 최초의 유성 장편영화 ‘Lights of New York’을 상영했고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 ‘On with the Show‘도 1929년에 선보이며 혁신적인 기술들을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잭은 제작을 주도하며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을 직접 골랐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2차세계대전을 전후해 성장을 거듭했고 반공주의 영화, 반파시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정부와 협력하며 그 존재감을 꾸준히 키워갔다.
1940년대와 50년대, 워너브라더스는 잭의 주도로 ‘말티즈 팔콘’, ‘카사블랑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유 없는 반항’ 같은 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연달아 내놓는다. 이 시기 워너는 단순히 성공한 스튜디오를 넘어, 미국 대중문화 자체를 이끄는 중심적 존재가 됐다.
이름만 남기게 된 형제 간 갈등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형제 사이의 걷잡을 수 없는 열이 자리했다. 잭은 이미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제작 구조를 굳히고 있었고, 1950년대에 들어서는 회사 지분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형들을 속여 사실상 유일한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워너가(家)를 세운 형제 사업은 그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워너브라더스라는 이름 아래 네 형제가 함께 존재한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회사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지만 이들 형제들의 말로는 씁쓸했다. 회사를 장악한 잭은 정력적으로 활동해오던 이전과 달리 이제 영화제작에 지쳤다며 1966년 자신의 회사를 세븐아츠 제작사에 3200만달러의 금액으로 매각한다. 70대의 노인이 된 잭은 스튜디오에서 물러난 뒤 개인적으로 영화산업에 투자를 했으나 이제는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채 1978년 숨을 거둔다.
워너브라더스를 이끌었던 잭 워너
‘형제의 회사’에서 ‘미디어 공룡’으로
형제의 손을 떠난 이후에도 회사의 성장세는 멈추지 않았다. 워너브라더스는 더 이상 형제의 회사가 아니라 기업 간 인수·합병 물결 속에서 성장하는 거대한 미디어 집단이 되어 갔다. 1990년, 타임(Time Inc.)과의 합병으로 탄생한 ‘타임워너’는 뉴스·잡지·케이블·영화·애니메이션 등 거의 모든 미디어 장르를 아우르는 전방위 미디어 공룡이 됐다. 그러나 이 확장은 오래지 않아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맞는다.
타임워너 그룹 당시 로고
2018년, 당시 세계 최대 통신사였던 AT&T가 타임워너를 85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미디어와 통신이 결합한 독특한 기업이 탄생했다. AT&T는 “네트워크에 콘텐츠를 얹어 구글·페이스북과 경쟁한다”는 청사진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at&t와 타임워너
막대한 부채와 낡은 기술 구조, 그리고 AT&T 경영진의 미디어 산업에 대한 무지까지 겹치며 이 인수는 역사적 실패로 불렸다. AOL-타임워너 합병 이후 최악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시가총액 수십억 달러가 증발했고, AT&T는 결국 미디어 사업을 억지로 분사시키며 부채 상당 부분을 떼어냈다.
역사적 실패, 고난으로 이어지다
이렇게 분사된 워너미디어는 2022년, 디스커버리와 합병해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새 회사는 탄생 직후부터 이미 400억 달러의 부채를 짊어진 상태였다. CEO 데이비드 자슬라브는 비용 절감을 위해 수십 개의 프로그램을 갑자기 폐기하고, HBO Max 오리지널을 대거 삭제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지만 실적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특히 미국 케이블TV 시장의 급속한 붕괴는 WBD의 핵심 수익원을 무너뜨렸고, 스트리밍 경쟁에서 넷플릭스·디즈니·아마존을 따라잡기에도 역부족이었다.
WBD 로고
쟁탈전으로 번진 워너가의 운명
그렇게 2025년 10월, WBD 이사회는 결국 공식 매각을 선언한다. 이후 워너브라더스 인수전은 순식간에 뜨거운 3파전으로 번졌다. 파라마운트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인수를 자신했고, 컴캐스트(유니버설)는 대규모 차입을 통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패를 흔든 건 넷플릭스였다. 넷플릭스는 현금 동원력에 더해 자사주를 결합한 공격적 조건을 제시했고, 결국 2025년 12월 5일 단독 협상권을 확보한다. 그날 바로 넷플릭스는 827억 달러 규모의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미디어 산업의 지형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워너브라더스 로고 변천사
100년의 여정, 스트리밍 제국에 안기다
워너브라더스 1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흥행작은 뭘까. 바로 2023년작 바비다. 북미 5억6000만달러, 글로벌 12억8000만달러를 벌어들인 ‘바비’는 워너의 역대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그 눈부신 성공 이후, 워너는 놀라울 정도로 추가 히트작을 내놓지 못했다. DC의 연이은 부진, HBO의 제작비 부담, 케이블 시장의 급격한 붕괴, 스트리밍 경쟁력 약화까지 모든 악재가 겹치며 WBD는 점점 체력이 떨어져 갔다. ‘바비’는 영광의 정점이자 동시에 그 이후의 긴 침체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이 됐다.
가난한 네 형제가 작은 극장에서 영사기를 돌리며 시작했던 스튜디오는, 그렇게 100년 뒤 넷플릭스라는 게임체인저의 품에 안길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전통 스튜디오가 어떻게 흔들리고, 스트리밍 제국이 어떻게 부상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워너브라더스가 남긴 영화의 유산은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채울 것이지만, 이제 그 브랜드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는 더 이상 워너가 아니라 넷플릭스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넷플릭스에 달린 워너브라더스의 운명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