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 기자]
AI에게 '맛있는 음식'을 물어본다면 이런저런 음식을 추천해 줄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고급 레스토랑부터 숨겨진 맛집의 메뉴 및 평점까지 원하는 대로 알고 싶은 정보만 취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냐고 질문하면 뭐라고 답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할머니가 해 주신 된장찌개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음식'이라는 답이 눈에 띄었다. 그건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는, 단 하나 뿐인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게 사랑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결과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은 베스트셀러라도 나만 느낄 수 있는 감성과 감동을 주는 책이 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고 내가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고 내가 별로 감흥을 못 느낀다 해도 잘못은 아니다. 음식, 책, 여행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감정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몽고메리의 숨은 단편을 번역하며
▲ ?책표지
ⓒ 북도슨트
우리에게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작가로 알려진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앤이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이야기로 전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았다. 똑똑하지만 엉뚱하고 실수도 많은 소녀였던 앤 셜리의 모험, 길버트와의 애증과 사랑,
다이애나와의 우정 등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감동은 여전히 강력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 이름이나 내용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몽고메리가 500여 편의 단편과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필자는 아동서 및 청소년 작품, 특히 영미권에서 나온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로 된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도 독서 중에 받은 문학적 감성과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필자는 번역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고민하던 중 올해 '북도슨트 출판사'의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몽고메리의 작품 중 크게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을 찾았고 그 가운데 한 단편을 골라 번역서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바로 <허브 정원의 비밀(The Garden of Spices)>이다.
이야기는 푸른 방에 갇힌 한 고아 소년, 짐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장난꾸러기이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짐스는 이 방이 너무 무섭고 끔찍하다. 어느 날 방의 유일한 창문을 통해 나갔다. 그때 만난 고양이를 따라 짐스는 허브로 가득한 정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낯선 이웃 여인을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은 고개를 들더니 짐스를 돌아보았다. 순간 짐스는 뭔가에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짐스가 짐작한 미인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여인의 얼굴 한쪽에는 붉은 흉터가 끔찍하게 남아있었다. 그녀 얼굴에 있던 아름다움이 흉터 때문에 바래서 그랬을까. 짐스는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33쪽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다 보면 짐스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에 빠질 수도 있다. 혹자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면서 동심에 젖어 들기도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 한 번쯤 꿈꿨을 수도 있는 상상과 모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어떤 추억이 닮은 듯 다른 기억으로 떠오른다면 각자의 마음에 있었던 정원을 되살린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북도슨트의 한잔 시리즈'의 열세 번째 작품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 소설이다. 작은 공포와 소년의 외로움, 어른과 아이의 우정만 있는 아동서일 뿐만 아니라 사랑 이야기도 담겨있는 작은 정원 같은 책이다.
몽고메리의 팬이나 평소 장르를 가리지 않는 독자는 물론 책을 한번 읽고 싶지만, 왠지 큰 벽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어른을 위한 동화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푸른 방의 공포를 이겨내고 창문 밖 세상으로 나간 소년이 고양이를 따라 여행한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 또한 누군가에게 조용히 북도슨트 같은 안내자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